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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on EOS 30D는 그날 바닥에 놓여 있었다. 스트랩이 풀린 채로, 누구의 손도 아닌 위치에 있었다. 카메라는 세워져 있지 않았고, 그렇다고 가방 안에 정리된 상태도 아니었다. 잠시 사용되었다가 내려놓인 물건처럼 보였다.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장남은 장난감 자동차를 바닥에 두고 조작하고 있었고, 둘째는 Canon EOS 30D를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둘째는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잘 찍으려 하지 않았다. 셔터를 누르겠다는 목표도, 화면을 확인하겠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는 목적을 수행하는 도구라기보다, 손에 들 수 있는 물건으로 다뤄지고 있었다.
나는 이 상태를 그대로 두었다. 카메라를 다시 집어 들지도 않았고, 아이에게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설명하지도 않았다. 이 기록은, 누구의 손에도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카메라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지켜보는 데서 시작됐다.

손을 떠난 카메라가 보여준 첫 번째 변화
Canon EOS 30D가 내 손을 떠난 순간, 이 카메라는 판단을 요구하지 않는 물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사용할 때 이 카메라는 언제나 선택을 요구했다. 찍을지 말지, 지금인지 아닌지, 이 장면이 남을 만한지 같은 질문이 앞섰다. 하지만 아이 손에 있거나 바닥에 놓인 상태에서는 그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둘째는 카메라를 들고 몇 걸음 움직였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 행동에는 망설임도 없었고, 실패에 대한 의식도 없었다. 아이는 이 카메라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들 수 있고, 내려놓을 수 있고, 다시 집을 수 있는 물건으로 대하고 있었다.
이 변화는 기능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같은 카메라였고, 같은 무게였고, 같은 구조였다. 달라진 것은 사용자의 기대였다. 기대가 옅어지자, 이 카메라는 판단에서 한 발짝 물러난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지점에서, 사용하지 않는 상태 역시 이 도구의 한 모습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장난감 옆에 놓였을 때 드러난 차이
장남이 조작하던 장난감 자동차는 계속해서 행동을 요구했다. 버튼을 누르면 움직였고, 그 움직임은 다시 다음 조작을 불러왔다. 장난감은 아이를 붙잡고 있었고, 아이는 그 요구에 반응하고 있었다.
반면 Canon EOS 30D는 아이를 붙잡지 않았다. 둘째는 카메라를 들고 있다가 내려놓았고,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다가 다시 집었다. 이 반복은 어떤 긴장도 만들지 않았다. 카메라는 다음 행동을 요구하지 않았고, 결과를 확인하라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하나는 사용자를 끌어당기는 물건처럼 보였고, 다른 하나는 사용자를 놓아주는 쪽에 가까웠다. Canon EOS 30D는 아이에게 어떤 방향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이 카메라를 오래 들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필요할 때 집고, 필요 없으면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 장면은 이 카메라의 속도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빠르게 반응하지 않는 구조는, 아이에게는 불편함이 아니라 여유로 작용하고 있었다. 결과가 느리다는 특성은, 그날만큼은 부담이 아니었다.
‘찍는 도구’가 아닌 ‘보이는 대상’이 된 순간
그날 나는 아이들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장면을 사진으로 남겼다. 하지만 그 사진들에서 중심은 아이가 아니었다. 프레임의 중심에는 Canon EOS 30D가 있었고, 아이들은 그 주변에 위치했다. 이 선택은 의도적이었다.
지금까지의 기록에서는 항상 내가 카메라를 들고 아이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날은 구조가 달랐다. 아이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고, 나는 그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메라는 더 이상 시선을 향하는 도구라기보다, 시선의 대상에 가까워져 있었다.
중요한 것은 찍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날 기록의 중심에는, 카메라가 어떤 위치에 놓여 있었는지가 남아 있었다.
다시 손에 들었을 때 생긴 기준의 변화
아이들이 각자의 물건에 흥미를 잃고 흩어진 뒤, Canon EOS 30D는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이 카메라는 다시 판단을 요구하는 도구가 되었다. 다만 이전과는 다른 기준이 하나 남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이 카메라는 아무 목적 없이 존재했다. 그 상태를 직접 보고 나서 다시 손에 쥐니, 이 도구가 반드시 촬영으로 이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이 카메라는 찍지 않아도 되고, 들고만 있어도 되고, 잠시 다른 손에 넘어가도 되는 물건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인식은 사진의 결과와는 관계가 없다. 사용의 범위에 대한 감각에 가깝다. Canon EOS 30D는 여전히 오래된 도구이고, 느리고, 즉각적인 만족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특성 덕분에, 이 카메라는 특정한 목적에만 묶이지 않는다.
이 기록이 시리즈의 끝에 놓이는 이유
이 글은 아이들이 무엇을 찍었는지를 남긴 기록이 아니다. 이 글은 카메라가 사용되지 않는 상태에서도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지켜본 기록이다. 지금까지의 글들이 촬영과 판단을 중심으로 쌓여왔다면, 이 글은 그 바깥을 다룬다.
Canon EOS 30D는 그날 바닥에 놓여 있었다. 누구의 손에도 고정되지 않았고, 어떤 목적도 수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상태에서 이 도구의 성격은 또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판단을 요구하지 않을 때, 이 카메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날 Canon EOS 30D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목적이 사라진 자리에서, 이 도구의 성격은 오히려 분명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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